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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세계적인 천재 성악가 바리톤 최현수

예술의 기여, 제자 사랑, 청렴결백한 정신 삶에서 엿보다


트럼프 美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연설에서 우리나라가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됐다며 극찬했다. 특히, 한국 뮤지션들은 전 세계의 콘서트 장을 메우고 있다고 했다. 클래식계도 예외는 아니다. 1986 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베르디 국제 콩쿠르에서 1위와 최고 바리톤상, 1988년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 우승, 1990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성악부문 1위를 수상하며 24년만에 외국인이 수상한 전례 없는 역사의 주인공,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성악 콩쿠르 13개 중 13개 모두를 석권하고 국제무대를 누비며 대한민국을 빛내는 성악가 최현수 교수가 있다.




 


미래 성악도들에게 거장의 조언은 큰 힘  
기자는 입시철을 앞두고 좋은 학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주제를 기획하고, 평소 존경하는 한 성직자로 부터 전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성악과 최현수 교수에 대하여 듣게 됐다. 최 교수는 독학으로 세계적인 성악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며, 파바로티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파바로티와 함께 공연하며 미국무대에 데뷔해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중 1992년 한예종의 간곡한 요청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승낙의 이유는 평소 최 교수가 구상하는 교육과정을 구현하는 조건을 학교 측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위의 많은 음악가들이 그동안 음악계에 많은 기여, 남다른 제자사랑과 후배양성, 청렴결백하고 정직한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며 적극 추천해 최 교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무슨 취재냐며 거절하기를 여러 차례. 요즘 예술계를 지망하는 학생과 학부형들에게 조언을 들려주면, 유망 성악도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부탁하자 만남이 이루어졌다. 지난 7일 부암동 어느 레스토랑 정원에서 만난 최 교수는,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걸치고 목에는 짙은 초록색 스카프를 두른 캐주얼 차림새에서 예술인다운 풍모가 느껴졌다.




 


유학생활까지 평생 레슨비 10만원
최 교수는 199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교수로 전격 스카우트 됐다. 기자는 먼저 당시 구상했던 교육의 요점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외국은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과 전혀 다릅니다. 절대 음감을 가진 사람이 어떤 악보든 읽어내는데 시창수업을 레벨 1부터 시작하라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레벨에 맞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면 조기졸업도 가능합니다. 재능이 있으면 1학년 때도 오페라 싱어로 나갈 수 있죠” 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유학생활까지 합해 평생 레슨비가 10만원 들었다고 했다. 예고를 졸업하려면 몇 억이 든다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믿어 지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은 예술분야 학부형들의 한숨 소리가 큰데 부모의 역할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재능 있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이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부모가 주도해서 자식을 끌고 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점이 교육의 폐단이죠.”라며 “음악도 스스로 인내와 땀을 흘리는 과정을 거쳐 생각을 극대화하면 지혜가 생깁니다. 본인 스스로 깨닫게 되는 거죠. 왜 음악을 하는지, 그럼 음악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죠. 부모가 바로 그런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 교수의 어린 시절부터 음대생이 되기까지 모습은 어땠을까.




 
노력한 만큼 결과 바라는 성실한 학생  
1958년 영등포에서 5녀 1남 중 귀한 막내로 태어났다. 누나들은 모두 노래, 기타, 문학 등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어린 현수도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다. 잘 나가던 집안은 어느 날 살림이 기울어 피아노를 살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음악책 뒤에 나오는 건반을 찢어서 교복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누르는 연습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가 월급으로 산 풍금이 집안의 보물이 되어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식구 들이 모두 잠들면 툇마루로 나와, 몰래 만든 열쇠로 열고 불도 못 켠 채 창문에 비치는 달빛을 등불 삼아, 손가락만 움직이며 소리 없는 반주연습을 나날이 했다. 교회에서 도둑 연습도 수없이 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6개월 후 찬송가 반주를 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이미 음악가의 길을 마음속에 그렸다. 소리 없는 피아노 연습으로 음악의 기본을 다졌고, 음악통론을 독파해 이론실력을 쌓았으며, 사전에 발음기호를 도표로 그려 외우며 가사딕션을 공부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 대학생 이상의 실력을 두루 통달했다. 라디오에서 한 번 들은 곡은 그의 머릿속에 악보로 각인되었다. 슈베르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 음악 위인전을 읽으며, 그들이 이겨낸 고비를 보며 나도 해낼 수 있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루는 선배가 집으로 찾아와 대학 합격 소식을 전했다. 그의 아버지는 딴따라가 될 거냐며 반대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성악가가 될 재능이 있다는 선배의 말과, 좋아하는 것 하면서 살고 싶다는 아들의 간곡한 심정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였다. 1977년 연세대 음대에 실기 수석으로 입학했다. 예고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지도해 줄 선생님을 찾는 방법도 몰랐고, 개인레슨 한번 없이 혼자서 레벨을 올리며 노력한 결과였다. 자신을 가로막았던 물리적 환경을 극복하고 한 시대를 풍미하는 세계적인 거장 최현수 교수는 어떤 교육자였을지 궁금하다.
 


정직한 음악을 구현할 수 있는 사회  
그의 교육 철학은 이렇다.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실천하면 또 그걸 보고 따라온다’ 무슨 뜻일까. 영화 타이타닉 장면 가운데 일부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사람은 두 명인데 자리는 하나밖에 없을 경우, 살 수 있는 그 자리에 누구를 태울까. 최 교수는 제자를 태우겠다고 말했다. 선생이 희생하면 제자가 잘 된다는 것이다. 즉, 희생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면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력을 판가름 하는 심사의 칼날은 날카롭다. 콩쿠르에 출전한 학생 실력이 3등인데,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로 1등을 줄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글로벌 시대에 학교가 달라도 재능을 발굴하고, 그 재능을 가진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정직한 음악을 구현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누군가 먼저 돌을 놓아야 징검다리가 만들어지듯,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초심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이런 신념으로 성악에 재능을 가진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문화예술교육 기회를 넓히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현수 교수의 음악을 들어보니  
바리톤은 남자성악가의 음역대에서 테너와 베이스의 중간 음역대를 말한다. 맑고 부드러운 음성의 최 교수는 독일 리트에서는 섬세한 표현으로, 오페라에서는 역동적이면서 드라마틱한 소리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준다. 목소리는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노래에 대한 표현은 부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최 교수는 모든 노래를 최현 수화 하는 능력이 있다. 절대 과장되지 않고 부담 없는 정직한 소리로 모든 장르의 노래가 최 교수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최 교수의 제자들은 전 유럽에 걸쳐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고, 각종 콩쿠르에서도 상을 받으며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최 교수 이후 21년만에 우승자가 2명이 나왔는데, 이들도 모두 그의 제자로, 스승이 온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중이다.
 


취재 후기
점심을 굶고 차비를 털어 음악회를 가고 음반을 사는 등 꿈을 향한 경험과 노력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 나쁜 조건도 발전 기회로 삼아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수차례 수상하며 성공할 수 있다는 것, 정작 자신이 스승이 되어서는 제자의 무한 가능성을 믿고 스스로 능력을 계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존재가 되었다. 인터뷰 속에서 이러한 거장의 단면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주변 지인들은 최 교수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아마 음악을 하지 않았으면 스트레스로 온전하지 못했을 거라고 억울한 심정을 대변했다. 무슨 말인가. 얼마 전 법조인이 아까운 생명을 자살로 마감하는 뉴스를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조직에서 지시에 따라 움직인 것이, 나중에는 개인적인 비리인 양 비쳐 얼마나 억울했으면 죽음을 택했겠냐고 했다. 덧붙여 역사학자들이 예측한 미래는 낙관적이었지만, 완전히 빗나갔다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내재된 이기심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최 교수처럼 아무런 사심 없이 제자를 위하는 마음이 어떻게 조직의 희생양이 되었는지 곱씹어 볼 일이다.
 
글 조선영 음악전문기자 사진 서연 
 

 
바리톤 최현수 프로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이탈리아 베르디국립음악원, 스칼라 가극장 오페라아카데미, 오지모아카데미, 카를로 베르곤찌 아카데미,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센터 수석졸업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남성 성악부문 1위, 차이콥스키상 베르디 국제콩쿠르 1위 베르디 국제콩쿠르 최고 바리톤상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 대상 마리오 델 모나코 콩쿠르 1위 칼리아리 비엔날레 국제 콩쿠르 성악 대상 미국 단젤로 국제콩쿠르 1위 코젠짜 국제 오페라 콩쿠르 1위 난파음악상 수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2회 수훈 (옥관상, 보관상) 문화부장관상 효시상 수상 1992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교수 현 신한음악아카데미 교수 
 




 
제자 바리톤 한명원이 말하는 최현수 교수는  
최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199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서입니다. 저는 성악을 시작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몇 년씩 입시준비를 하고 온 친구들에 비교하면 성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었죠. 처음 1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워낙 꼼꼼하시고 디테일하게 레슨을 하셔서 악보 한 페이지 넘어가기도 힘들었어요. 그만큼 저도 교수님의 모든 것을 배우고자 노력했고, 2년만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40회 베르디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할 정도로 결과가 좋았습니다. 교수님은 늘 노래는 인성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단 한번도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힌 적 없었어요. 지금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교수님을 떠올리며 참으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정말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바리톤 한명원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대 수석 졸업 이탈리아 베르디 국제성악 콩쿠르 1위,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국제성악 콩쿠르, 3위, 이탈리아벨리니 국제 성악 콩쿠르 3위, 아싸미 국제 콩쿠르 1위 등 현재 안양대학교 음악학부 조교수로 재직





 
제자 베이스 박종민이 말하는 최현수 교수는  
저는 성악을 공부하면서 최 교수님의 슈베르트 가곡이나 차이콥스키 콩쿠르 영상을 보며 다른 성악가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고 동경해왔습니다. 고3이 되자 부모님과 선생님께서 서울대와 한예종을 추천할 때 저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최 교수님이 계시는 한예종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최 교수님과 사제간의 인연이 되었고, 교수님은 다른 어느 교수님들보다 더 학구적이시고 오페라, 오라토리오, 가곡 등 다양한 레퍼토리도 많이 가지고 계셔서 필요한 경우 음반을 추천해주시거나 악보를 필사해 주시기도 하셨어요. 특히, 저처럼 낮은 음역대의 베이스의 경우 낮은 조성의 악보가 필요한데 언제나 교수님은 힘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필요한 악보를 직접 그려주셨어요.


최 교수님은 언제나 제자의 미래와 앞날을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3학년 재학 중일 때 벨베데레 콩쿠르에서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인 라스칼라 관계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때 졸업과 유학을 고민하자, 교수님은 ‘라스칼라 극장의 제안은 인생에서 쉽게 받을 수 있는 제안이 아니다. 한국에서 졸업을 못 하더라도 너의 미래를 위해 지금 온 기회를 놓치지 말라’ 며 조언을 해주셔서 제가 좀 더 일찍 유럽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고 현재의 제가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셨어요.


저는 빈에 있으면서 교수님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큰 고통을 받고 계시고 그동안 이룬 업적들이 가려져 저 또한 마음이 아픕니다. 만약 교수님께서 안 계셨다면 저는 한예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교수님의 차이콥스키 콩쿠르 영상을 보며 저 또한 우승에 대한 꿈을 꾸었고 교수님 뒤를 이어 꿈을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교수님께서 닦아놓은 길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항상 목표를 세우고 13개의 콩쿠르를 모두 석권하신 것처럼 저도 늘 도전하고 있고, 2015년에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전 소련연방의 명가수 알렉산더 키프니스(1831-1978)가 베이스음역으로 전곡을 부르고, 그 이후 베이스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것을 교수님의 응원에 힘입어 해냈습니다. 교수님은 제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분입니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고 명예가 꼭 회복되기를 제자로서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베이스 박종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 이탈리아로 유학 3년간 정부장학생으로 밀라노 라스칼라극장 아카데미 졸업 2011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 성악부분 1위, 빌바오 국제성악 콩쿠르 1위, 19회 도밍고 오페랄리아 국제콩쿠르 바그너 특별상, 2015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우승 현재 빈 국립 오페라단 전속 솔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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