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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사회 어른을 찾아] (사)가족아카데미아 이근후 이사장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잘 되어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요!

   
▲ 이근후 이사장(오른쪽)과 김윤옥 기자(왼쪽) (사진= 장해순 기자)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의 저자 (사)가족아카데미아 이근후 이사장을 만났다. 재미있게 사는 것, 누구나가 바라는 일이지만 재미를 느끼는 대상이나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2013년 2월 출간 된 책이 1년 넘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있다. 50년을 교수로 정신과의사로 환자를 치료한 그를 만나 그만의 재미를 알고 싶었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하루의 모든 일상이 그에게는 재미다.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인 산증인이다.

  관행을 바꾸는 생각이 들거나 실행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창의적인 발상 자체도 아무나 못하지만 그것을 실행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용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이사장은 정신과 환자는 무조건 폐쇄병동에 입원시킬 때 일반병실을 병행했으며, 정신질환치료법으로 사이코드라마를 도입했다. 1980년대 엘빈 토플러의 책『제3의 물결』에서, 미래사회에는 대가족이 한지붕 아래 산다고 예측했는데 이 이사장이 현대판 대가족의 롤모델이 아닐까! 2남2녀의 자손과 함께 다섯 세대의 대가족이 한 울타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랑은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성립한다.
  이근후 이사장(80세)은 대학시절 학생회장으로 4.19와 5.16 반대시위에 참여해 감옥살이를 했다. 그 여파로 젊어서는 많은 고생을 했다. 연세대 교수와 이화여대 교수를 하며, 40여 건의 정신의학서를 번역 또는 저술했다. 아내 이동원도 이화여대 사화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 두 사람이 아침이면 같이 연구실로 출근을 한다.

  장남 이명현(연세대 천문대 책임연구원), 며느리 이은성(치과의사),  손자 이한결·이하늬, 장녀 이영주(가정의학과 전문의), 차녀 이은채 (상담전문가), 사위 최선희(성서대학교 교수), 손자 최솔, 차남 이장욱(수원대학교 교수), 며느리 박은선(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손자 이선재가 있다. 2남2녀와 사위 며느리가 학자와 의사다. 가족 간의 사랑을 돈독히 하기 위해 거절하는 법부터 며느리에게 가르쳤다.‘싫어요’보다는‘안돼요’를 싫다는 것은 감정이지만 안된다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아니요’를 말해 서로 부담 갖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집안 분위기를 만들었다. 현 시대의 대가족답게 가족 간의 의사소통은 주로 이메일로 한다.

  자손들은 아버지께서 제일 잘하신 일이 정년퇴임을 하며 다섯 세대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5세대가 힘을 합쳐 집을 같이 지으니 전셋돈으로 제 집을 가질 수 있었다. 함께 살기를 결정하며 상호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을 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손주가 결혼할 때면 분가해도 좋다는 것이다. 가끔 강의도 하고, 원고도 쓰고, 한국석불문화연구회 고문으로 전국의 석불을 찾아 여행을 하며 시낭송회 모임도 한다. 지난달에는『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책의 저자로 장남인 이명현 천문학자(별 헤는 밤 저자)와 같이 북토크에 참여해 아들과 따로 또 같이 인간 책이 되어 독자와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인본주의에 따른 멋진 거짓말
“내가 거짓말을 했었지. 지금 같으면 통하지도 않을 테지만 그 때는 가능했어.”
  이 이사장이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 있을 때부터 정신과 병동을 무조건 폐쇄 병동으로 하는 것에 대해 수정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과장의 철학에 따라야 하기에 말을 못하다 이화여대 정신과 병동의 책임자로 옮겨오니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폐쇄병동 일부를 일반병실같이 개방병실로 하려 하자 많은 저항에 직면한다. 이대병원의 다른 교수와 보호자의 반발이 있어, 보호자들은 의사가 설득하니 말을 들었으나 동료 교수들은 아니었다. 할 수 없어 전체 회의를 소집하고는“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정신과 환자들도 일반병실에 있습니다. 우리가 꼭 폐쇄병동만 고집해서야 되겠습니까?”1970년대 초, 당시는 지식인일수록 선진국의 사례라면 대부분 수용할 때였다.

Q. 왜 많은 저항에 부딪치면서까지 굳이 일반병실을 두려했나요?
  사람은 누구나 속박되어 있으면 싫잖아요. 그러니 그 불만이 환자를 돌봐주는 가까운 사람들, 간호사나 조무사들과 마찰이 생기는 거예요.

Q. 정신과 치료는 약물과 수술뿐만이 아닌 인간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일반병실로 바꿈으로써 어떤 효과가 있었나요?
  남들이 통상 관념으로 우려한 많은 문제는 덜 일어났으며 환자를 치료하는 내 느낌이 좋았습니다. 병원에서 환자와 직원 간의 사소한 분쟁이 많이 줄었지만, 학술적으로 그 부분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과를 뭐라 말할 수는 없네요.

Q. 그 당시 선진국 병상은 가 본 적이 있나요?
  아니 없어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 멋진 거짓말이라 한거죠.

 

   

▲ 네팔에서 힐러리 경과의 만남은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네팔에서의 6개월
‘젊어서는 산 정상에 오르는 일이 재미있었다면 나이 들어서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바로 지금 자신에게 맞는 재미를 찾는 것이 진정 나이답게 늙어 가는 일이다. 진지한 성찰을 통해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럼으로써 현재를 더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다.’이 이사장이 쓴 책 내용 중 일부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도, 대화를 하면서도 이 이사장의 깊이 있는 단순함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네팔에 가기를 그토록 원했을 때는 못가고 마칼루 학술원정단의 학술요원으로 6개월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장선생님께 들은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반가 에드몬드 힐러리경을 그 때 만났습니다. 30년을 기다린 끝에 그와 만난 1시간의 대화는 삶에 있어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죠. 또 명상가인 친구와 칼린초크 5,000m 고지에서 2주일간 천막 쳐놓고 트레킹하고 명상하며 나에 대해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왜 나는 권위에 대해서 저항적일까? 남들이 외유내강형이라고 하는 내가 4.19 때 학생회장을 하며 그렇게 과격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나의 문제를 직면해서 보며‘아 이런 것 때문에 내가 그 때 이런 행동을 했구나’라고 알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적응’에 대하여
  이 이사장은 네팔에서의 인연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네팔 의료봉사활동을 30년간 했으며, 보육원에는 40년 동안 꾸준히 봉사하고 있다. 의학이라는 최첨단의 공부를 하며, 히말라야 자연의 위대함 앞에 자신의 내면 보는 것을 경험한 것이 실생활에 쭉 이어져오는 것은 아닌지… 한쪽 눈의 실명도 몸의 불편함도 자연스런 일상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난 적응이라는 말이 참 좋아요. 적응은 형편에 따라 맞추어가는 것인데, 나이가 한 살 한 살 많아질 때마다 환경은 달라져요. 추우면 옷을 입고 더우면 옷을 벗으며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 적응입니다. 추운 겨울 벌거벗으면 얼어 죽어 옷을 입어야하죠. 옷을 입되, 이왕이면 다홍치마인 것입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적응과 다홍치마, 이 두 가지 이유로 사회가 발달하고, 성숙한가 안 성숙한가, 수양이 되었나 안 되었나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배고파 젖을 빠는 2살 어린아이가 남에게 엄마젖을 양보할까요. 그러나 어른은 내 배가 고파도 때에 따라 양보합니다. 산속에 앉아 하는 수양도 있겠지만 나이에 걸맞는 행동을 하고자하는 것도 수양입니다. 나이 드니 느린 걸음에 불편한 눈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환자에게 주사바늘 맡기기
  이 이사장이 네팔 가기 전 1970년대 군의관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일회용  주사기가 보편화되었지만, 그 당시는 하나의 주사바늘을 소독해서 여러 명에게 쓰다 보니 바늘이 무뎌져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았다. 이 군의관은 주사바늘을 환자에게 하나씩 주었다. 그러자 환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바늘이 닳아 아플 것 같다 싶으면 숫돌에 갈아 날카롭게 만들었단다. 군의관은 주사 놓기 쉽고 환자는 덜 고통스러웠으니 서로에게 좋은 처방이었다. 명상체험 전인데 이런 지혜는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자연의 이치를 알아 사회에 적응하는 이사장. 그의 연구실 앞 큰바위 얼굴 옆모습이 그와 흡사하다.(사진= 장해순 기자)

취재 후기
  취재하며 한창 대화가 무르익었을 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이사장님, 꿈에 꿈인 줄 알면서도 왜 마음대로 못하죠. 그럴 때는 잠에서 깨면 얼마나 아쉬운지….”
“이사장님은 현재 가장 자유롭게 재미있게 살고 있나요?”질의서에 있는 사항 외의 돌발질문에 답은 언제나 알기 쉽고 간결했으며 이사장님의 솔직함에 공감이 갔다. 수행자가 따로 없었다. 유리하든 불리하든 외적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는 것 같다. 네팔에서 떠날 때면 그간 수고한 셀파들에게 입장을 바꾸어 서비스 받는 파티를 해주었고, 보육원의 아이들에게는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원하는 아이들에게는 시를 쓰게 하고 1년에 한번 그들의 시집을 내준다. 아이들의 반응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봉사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훗날 어떤 계기가 되었을 때 아이들이‘아 그 때 그랬었지’하며 동력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잠재력을 믿기 때문이란다. 오랜만에 사회어른 기사를 썼다. 기자에게 현재 이 순간을 느끼는 기쁨을 다시 일깨워주고, 나이 들어가며 잘 적응해야 함을 깨우쳐 준 이 시대의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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